뭐 크게 내세울거는 없는 내용이지만
여성시대에서 제사연을 방송 해 줬네요.
이 방송을 들으면서 초심을 잃지않겠다고
다시한번 다짐 해 봅니다.
용량이 초과되어서
분할해서 업로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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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를 듣다 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사시고 갖은 고생을 한 후에 보란 듯이 성공하신 분들의
사연이 많아 저의 이야기를 감히 여기서 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었는데, 지난번 "회식 한번 합시다"에
사연이 소개되고 난 뒤 용기를 얻어 제 이야기를 이렇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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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 시대를 맞으며 구조적 병폐를 고치려는 화물연대의 파업 등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무언가
다른 대안을 찾던 저는, 2006년 6월 3일 인천공항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시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13시간을 날아 시카고에 도착한 후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2시간을 더 날아가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껏 부푼 가슴을 안고 공항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열대의
바다 빛깔보다 더 파란 하늘은 마치 저의 캐나다에서의 제2의 인생을 축복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주알선업체에서 마중 나온 사람의 차에 몸을 싣고 한참을 달려 몇 달간 지낼 하숙집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서쪽으로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먼저 온 사람들에 관하여 묻자 그는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서로 싸우고, 이간질하고.. 안좋은 사람들 같아서 일부러 다른 하숙집을 구해준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물어 물어 찾아간 이주업체 사무실에서 4명의 사내들을 만났습니다.
어제 들은 말 때문에 약간의 경계심이 있는데, 그들 또한 저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죠.
며칠이 지나서야 서로 통성명하고 저녁에 가끔 호프집에서 맥주한잔 하는 사이가 되었고,
이주업체의 말과는 다르게 트럭드라이버로는 이곳 온타리오주에서 이민이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한국에서 저의 취업비자 취득 여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이주업체와 계약 당시 계약금으로 천만원 이라는 거금을 그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줘버렸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그 돈을 돌려받을 용기도 마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였었기에 돌아갈 수도,
돌아가봤자 일 할 곳도 없었기 때문 이였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외국에서 보란 듯이 잘 살아보겠다고 홀로 계신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을 두고 온 저의 알량한 자존심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 치 않았던 거죠.
사실을 알게 되면 아내는 저에게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당장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느새 저는 "걱정하지마. 모든 게 잘 되고 있어."라는 거짓말을
아내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취업비자를 받으러 두 번이나 국경에 갔었지만 영어가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고,
마지막으로 이주업체의 일을 봐주던 법무사를 대동한 후
이민국직원의 "이름이 뭐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정도의 아주 기본적인
어의 없는 질문에 대답한 후, 그 정도 영어면 충분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마침내 취업비자를 손에 쥐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비자를 받은 후 첫 번째 회사에서 면허 취득을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비디오를 보며 교육받을 때는 거의 다 이해를 하겠는데, 그냥 말로만 하는 교육은 단 10%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교육도중 영어회화가 불가능하다는 회사측의 판단으로 같이 교육받던 4명 모두 해고를 당했습니다.
우리네 생각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니까 언어장벽에 대해 당연히 이해를 해 줄거라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건 영어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는 그런 사람 이였습니다.
한국에서 외국인과의 영어대화가 전혀 불편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트럭운전으로 생계를 꾸려나갈까요?
아무튼, 영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전체길이가 거의 25미터나 되는 큰 트럭을 몰고 물건을 싣고 국
경을 통과해 미국으로 배달을 갈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는 거였죠.
그런데도 이주업체는 걱정 말라고 큰소리 치며 우리들을 안심시키려 했었습니다.
그러는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부터 왔고, 사람이 많아질수록 문제는 점점 더 커져갔으며
급기야 단체로 소송을 거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취업이 제일 우선 순위가 아니고 사회적 이슈를 일으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제가 취업비자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아이들이 토론토로 왔고, 거의 빈손으로 오다시피 한
우리 가족에겐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시급했었습니다.
한국에서 6년간 25톤 카고트럭을 몰았던 저에게 남은 거라곤 단돈 만불($10,000)이 전부였고,
8천불로 10년된 중고 승용차를 사고나니 두 달치 월세만 남아 있었습니다.
취업비자 신분으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당장 끼니가 걱정인 상황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직업소개소에 등록을 하고 무슨 일이든지 연락이오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나갔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버스, 전철 그리고 버스를 두 번 더 갈아타고
두 시간 만에 찾아간 직업 알선소엔, 저 처럼 연락 받고 나온 일꾼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난민자격으로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 이였습니다.
일하는 중간 중간 그들도 나만큼이나 절박한 상황들인지 메니져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역력히 보였습니다.
하지만 순박한 그들은 절대 남을 밟고 올라서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서로 이야기 하다 보니 트럭드라이버를 하기 위해 취업을 기다리는 저를 몹시도
부러워하는 그들 때문에 '지금 이렇게 힘든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어 달 후 어렵게 취직한 두 번째 회사에서 6개월을 일하는 동안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아파트 월세를 제외한 일주일 생활비를 고작 20불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는 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버티는 거였습니다.
그 당시 토론토의 4인가족의 평균 생활비가 4000불정도였으니 그때의 생활이 어떠했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입니다.
별 어려움 없이 넉넉한 가정에서 귀하게 맞이로 자라온 아내에게 너무나 힘든 고난의 멍에를
지여준거 같아 차마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미안했었습니다.
저 또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면부지 타국에 가족들을 끌고 와서 이 무슨 고생인가 하는 자책감에
미치도록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후회도, 미안함도 그리고 괴로움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아내는 저가식품점에서 세일하는 품목만 골라서 장을 보고 동네에서 가라지세일이라도 할라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쓸만한 게 없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무료 어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해서 일식당에서 홀 서빙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제일먼저 주방에 일하시는 분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이러저러한 반찬거리도 자주 얻어와서 생활비를
줄여가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는 운행 중 트럭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지뿌둥하고 입안이 칼칼해서 뜨끈뜨끈한
커피한잔이 간절했지만, 일주일에 20불 생활비로 애들에게 맘 편하게 간식 한번 못 사줘 마음 아파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1불50전하는 커피한잔 살 용기가 안나 주머니 안의 동전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었습니다.
그때 생긴 습관으로 지금도 운행을 나가면 보름치 음식을 준비해서 트럭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왠만하면 레스토랑에서 사먹지 않고 가끔 주유 후 적립한 포인트로 피자 한 조각 사먹는 게 전부 이구요.
또한 두 번째 회사에서 일하는 6개월동안 체중이 14kg이나 빠졌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다 운행 가는 곳 마다 길 찾기가 힘들어 몇 시간씩 헤매기 일쑤였고, 한번 길을
잘못 들어 수십 킬로미터를 돌아가는 일도 많았으며,
국경을 통과할 때 마다 어눌한 영어 때문에 트럭을 수색 당하기도 하고, 어떨 땐 통관서류가 잘못되어
반나절을 국경에 붙잡혀있던 적도 부지기수 였습니다.
그런데다 이 직업을 계속 유지하더라도 영주권을 받을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고,
비교적 이민이 쉽다는 다른 주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할 용기와 기력도 없어서 마치 캄캄한
터널 속 같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기에 그 스트레스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라서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트럭 3대를 보유하고 있는 사장님을 알게 되었고, 저의 한국에서의 경력에
흥미를 보여 같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장님이 제 경력에 흥미를 보인 이유는, 여기서 일하시는 대부분의 한인드라이버들은 한국에서
운전경력이 없고 이민 온 후에 이곳에서 처음 시작하신 분들 이였는데, 한국에서 경력도 있고 트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아는 제가 트럭의 관리도 잘 할거라 판단했기 때문 이였던 거 같습니다.
저도 물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가 아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총 동원해 성심성의 것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 사장님은 이전 회사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주셨기에 형편도 차츰 풀리게 되어 마음에 여유도
가지게 되고, 가족들의 얼굴에서도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아내와 전, 그 동안의 생활고에 잊고 있었던 신분문제에 대해서 조금씩
고민하면서 취업비자로 마냥 허송세월만 보낼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유능하다는 변호사를 만나
영주권 문제를 상담한 후 사장님의 추천서와 함께 독립이민을 신청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충분한 자격조건은 아니었지만 지난 3년간 열심히 살며 성실히 세금도 내고, 계속해서 같은 직업을
유지하고 있음이 높이 받아들여졌는지, 지난 2010년 4월27일 캐나다에 온지 거의 4년만에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주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말합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고...
하지만, 단 한번도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제 곁을 아이들과 지켜준 아내가 너무 고맙습니다.
그 당시엔 그렇게도 힘들었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마치 꿈같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 할 수도 있게 되는군요.
6년전 아무런 준비된 것 없이 고국을 떠나왔던 어느 트럭커의 꿈은, 힘들고 막막했었던 그때를 기억하며
그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음에 그리고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와 행복을 느끼며 사는 지금!
어느 정도는 이루어 진 거라 믿습니다.
그동안 주위에서 그리고 고국에서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시고 응원해주신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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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제 사연이 소개된다면 제게 보내어질 상품은
고국에 있는 고향 친구들이 "선우회"란 이름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보내어 졌으면 합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자리를 잡을때까지 항상 응원해준 친구들이 고맙고, 그런 친구들의 봉사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싶은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주소:본동 종합 사회복지관
담당자 곽영철
우)704-826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2동 977-2